어떻게 살 것인가 (유시민)

어떻게 살 것인가

제1장 어떻게 살 것인가

계혹해서 지금처럼 살 수는 없다고 느끼거나 다르게 살고 싶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의 삶은 아직 충분히 훌륭하다고 할 수는 없다. 더 훌륭한 삶을 원한다면, 지금이라도 무언가를 바꾸어야 한다.
무엇이 되든, 무엇을 이루든, ‘자기 결정권’ 또는 ‘자유의지’를 적극적으로 행사해 기쁨과 자부심을 느끼는 인생을 살아야 훌륭하다고 할 수 있다.
자기결정권: 스스로 설계한 삶을 옭다고 믿는 방식으로 살아가려는 의지/권리
가장 먼저 바꿔야 할 것은 삶을 대하는 태도가 아닌가 싶다.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이제부터라도 내 마음이 가는 대로 살고 싶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내가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해치는 일은 절대 없어야 한다. 그리고 내가 하는 일이 세상을 더 훌륭하게 만드는 데 보탬이 되어야 하고, 그 과정에서 내 자신도 더 훌륭해져야 한다.
열등감은 삶의 기쁨을 갉아먹는 부정적인 감정 중에서도 단연 고약한 것이다. 열등감에 깊이 빠지면 자기 자신을 비천한 존재로 느끼게 된다.
‘신 포도 논리’
모든 나무와 벽을 오르고 넘어서야 행복한 삶, 성공하는 인생을 살 수 있는 게 아니다. 내게 적합한 나무, 노력하면 넘을 수 있고 넘는 게 즐거운 벽을 잘 골라야 한다. 그렇게 해야 인생이라는 ‘너무 짧은 여행’을 후회 없이 즐길 수 있다.
그들은 각자 자기의 나무를 오르고 있을 뿐이다. 나도 적당한 나무를 골라 오르면 된다. 그게 세상에서 제일 큰 나무가 아니면 어떤가. 내게 맞고 오르는 것이 즐거운 나무라면 된 것 아니겠는가.
하루가 모여 인생이 된다. 인생 전체가 의미 있으려면 살아있는 모든 순간들이 기쁨과 즐거움, 보람과 황홀감으로 충만해아 한다. 그런데도 때로 그것을 잊는다. 오늘의 삶을 누군가를 향한 미움과 원한으로 채운다. 가진 돈이 많은데도 더 많은 돈을 얻으려고 발버둥 치면서 얼마 남지 않은 삶의 시간을 탕진한다. 이미 높은 곳에 있으면서도 더 높은 곳으로 오르기 위해 오늘 누릴 수 있는 행복을 내일로 미루어 둔다. 그 모든 것이 나의 삶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묻지 않는다. 그리하여 운명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길 때쯤이야 비로소, 자신이 의미 없는 인생을 살았음을 깨닫는다. 그러나 한 번 살아버린 인생은 되돌릴 수 없으며, 놓쳐버린 삶의 환희는 되찾을 수 없다.
누구나 다치면서 살아간다. 우리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은 세상의 그 어떤 날카로운 모서리에 부딪혀도 치명상을 입지 않을 내면의 힘, 상처받아도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정신적 정서적 능력을 기르는 것이다. 그 힘과 능력은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다는 확신, 사는 방법을 스스로 찾으려는 의지에서 나온다. 그렇게 자신의 인격적 존엄과 인생의 품격을 지켜나가려고 분투하는 사람만이 타인의 위로를 받아 상처를 치유할 수 있으며 타인의 아픔을 위로할 수 있다.
카뮈가 주장한 바는 명확하다. 지금 이 순간 자유로운 존재로서 있는 힘을 다해 살라는 것이다.
놀고
일하고
사랑하고
연대하라. - 의미 있고 기쁜 삶을 구성하는 본질적인 요소
내면에서 솟아나는 욕망을 긍정적으로 표출하면서 살고 싶다. 사실 누가 그걸 하지 못하게 막은 것은 아니다. 그렇게 할 수 없도록 내 스스로 가두어버려서 그렇게 되었다.

제2장 어떻게 죽을 것인가

내 방식대로 살아야 한다. 누가 시키는 대로 또는 무엇인가에 얽매어 살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다.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 본능적 공포감 때문이다. 죽음에 대한 상념은 불안과 두려움을 부른다. 그래서 특별한 계기가 있을 때만 잠깐씩 의식의 표면으로 올라온다. 그런 때가 아니면 죽음은 잠재 의식 깊은 곳에 보이지 않게 웅크리고 지낸다.
하고 싶어서 마음이 설레는 일을 하자. 그 일을 열정적으로 남보다 잘 하자. 그리고 그걸로 밥도 먹자. 이것이 성공하는 인생 아니겠는가.
자살을 용기로만 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삶도 용기만 있다고 해서 마냥 잘 살아지는 것이 아니다. 사는 데도 죽는 데도 다른 것이 있어야 한다. 삶의 그리고 죽음의 의미에 대한 확신이다. 그것이 없으면 삶도 죽음도 주체적인 것일 수 없다. 삶은 습관이고 죽음은 패배일 뿐이다.
가난은 그저 돈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실직, 고금리 사채, 일하고 또 일해도 벗어나지 못하는 가난, 최후까지 버티다 굶어 죽는다. 그러나 사람은 최소한의 인간적 존엄까지 지킬 수 없을 때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한다.
우리들 각자는 사회적인 것이든 개인적인 것이든, 부정적인 생활 사건이 주는 스트레스를 관리하고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사회가 내 인생을 책임지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거리감’이다. 세상에 대해서, 타인에 대해서, 내가 하는 일에 대해서, 그리고 내 자신에 대해서도 일정한 거리감을 유지하는 것이다.
먼 훗날, 또는 긴 역사 속에서가 아니라 지금 바로 여기에서 내 스스로 의미를 느낄 수 있는 활동으로 내 삶을 채우는 것이 옳다. 그러니 내가 기쁨을 느낄 수 있는 방식으로 살자. 타인의 시선이나 평가에 얽메이지 말자.
인간 정신은 물질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물질인 뇌세포 활동의 산물이다. 물질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 인간 정신의 본질을 이해하려면 유물론에 기대지 않을 수 없다.
타인의 죽음은 내가 사는 세상의 한 조각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나 나의 죽음은 나의 삶과 내 자신, 내가 인식하고 상호작용하는 세상 그 자체가 통째로 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ㅇ벗으면 내가 인식하려는 세계 자체도 없다.
세상은 그대로 있는데 ‘나’의 존재만 무로 바뀐다는 것, 이것보다 더 처절한 상실이 있을까. 죽음에 대한 공포감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아무리 두려워도 의미 있는 삶을 후회 없이 살아가려면 이 숙명을 받아들여야 한다.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피할 수 없다면 의연하게 받아들이는 게 낫다. 자기 자신의 죽음까지도 냉정하게, 있는 그대로 바라보자는 것이다.
유전자의 영생은 생물학적으로 의미가 있을 뿐, 철학적 가치는 없다. 유전자는 기억하지 않으며 사유하지 않는다. 유전자가 영생한다고 해도 자기 자신을 ‘나’로 인식하면서 살아가는 삶의 주체, 지성을 가진 자아는 언제나 단 한 번만 존재한다.
살아 있는 동안, 지금 바로 여기에서, 나를 나로 인식하는 철학적 자아가 삶의 기쁨을 누리는 것이다.’나는 오 ㅐ자살하지 않는가? 무엇을 할 때 살아있음을 황홀하게 느끼는가? 지금 하고 있는 이 일이 내가 진정 하고 싶은 것인가? 내 삶은 나에게 충분한 의미가 있는가?’ 스스로 이렇게 물어야 한다.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없다면 인생의 의미도 삶의 존엄도 없는 것이다.
‘하고 싶다’는 욕망보다 ‘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이끌려 사는 인생은, 몸에 맞지 않는 옷을 걸치고 나들이를 가는 것과 비슷했다. 어떻게 걸어도 어색했다. 내 몸에 맞고 내 마음에 드는 옷을 입고, 내가 원하는 곳에 가고 싶었다.
온실 안의 화초가 아니라면 꽃도 나무도 다 바람을 맞으며 자란다. 타인의 자비에 기대지 않고 자기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종종 흔들릴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삶은 욕망과 규범의 충돌
욕망을 억압하면서 규범을 따르는 일이 참기 어려울 만큼 어색하고 불편하고 고통스럽게 느껴진다면, 욕망을 표출할 수 있는 문을 더 럽게 열어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규범은 자기 자신이 기쁜 마음으로 자연스럽게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따르면 된다.
최선을 다해 살았다고 해서 계속 지금까지 살았던 것처럼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내게는 매순간 미래의 삶을 새로 설계하고 새로운 도전을 할 권리가 있다.
몸보다 정신이 먼저 생물학적으로 사망하기 때문에, 철학적으로 죽는 것이 두렵다.
수백만 명의 국민들이 (치매로) 생물학적 죽음보다 먼저 찾아온 철학적 죽음을 고통스럽게 경험하는 중이다.
… 그러나 우산을 쓰고 비옷을 입어도 폭우가 쏟아지면 바지자락 젖는 것까지 피할 수는 없다. 최대한 노력하되, 그래도 옷이 젖으면 현실로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치매에 걸리면 자기 주도적으로 죽을 수 없다. 중증 치매 환자는 자신의 죽음을 인지하거나 이해하지 못한다.
모두들 좋은 삶, 성공하는 인생에 관심을 둔다. 그런데 오직 사는 데만 집중할 뿐, 잘 죽는 법을 알고 품위 있게 세상을 떠날 준비를 하는 데는 별 관심이 없다.
사망자의 절대 다수가 노환과 만성 질병으로 서서히 죽는다. 죽음은 무작정 기피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차분히 생각하고 준비해야 한다.
감각은 죽고 의식 혼자 사는 것은 삶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철학적 자아는 감각과 정신, 욕망과 이성의 통일이다. 운동이 멈춘 몸에 존재하는 의식은 아무 의미가 없다.
삶이 의미를 잃었다고 느낄 때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삶을 떠날 권리가 있음을 인정하자.
인간 존엄성의 필수 조건은 자유 의지이다. 살든 죽든, 인간의 존엄은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결정하는 능력과 관련되어 있다.
자유의지는 자신이 자기 삶의 주인임을 인식하면서 원하는 삶을 스스로 설계하고 그 삶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밀고나가는 정신의 태도와 능력이다.
사지마비 장애는 자유를 박탈했다. 라몬은 자유 없는 삶은 존엄성에 대한 모독이라고 느꼈다. 그는 자신의 결정이 칸트의 도덕법에 어긋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신성한 것은 삶 그 자체가 아니라 삶의 존엄성이며, 자유로운 판단에 따라 삶과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인간의 권리라고 생각했다. 삶의 의미는 살고 사랑하고 죽을 자유에서 비롯된다. 인간은 도덕과 법률의 권위를 유지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신의 뜻을 구현하는 도구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라몬이 제안한 준칙은 “기쁨이 완전히 사라지고 오로지 벗어날 수 없는 고통만 남은 상황에서, 그 고통을 견디면서 삶을 이어나가는 데 스스로 아무 의미도 부여할 수 었다면, 그 사람이 자유의지에 따라 죽을 권리를 인정해주자”
우리는 많은 것들로 삶을 채운다. 그런 것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한다. 일, 놀이, 사랑, 이념, 지식, 돈, 권력 … . 무엇이든 기쁨의 원천이 될 수 있고 삶의 의미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것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이 내 삶에 주는 기쁨과 의미를 아는 것이다. ‘당신은 무엇으로 인생을 채우고 있는가?’ 그것이 당신의 삶에 충분한 의미를 부여하는가? 살아있는 순간마다 당신은 기쁨을 느끼는가?

제3장 놀고 일하고 사랑하고 연대하라

글을 잘 쓰려면 어휘를 많이 알아야 한다. … (토지)(태백산맥)(장길산) 어휘가 풍부하고 문장이 아름다운 문학 작품을 반복해서 읽는 것은 베껴 쓰기 못지않게 어휘를 늘리는 데 도움이 된다.
또 다른 훈련법은 작은 수첩을 지니고 다니면서 끊임없이 메모하는 것이다.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 남들이나 사회에 ‘폐 끼치지 말고 살기’가 가능하다
내게 글쓰기는 단순한 생업이 아니다. 글을 써서 내 생각과 내가 가진 정보를 남들과 나누는 행위 그 자체가 즐겁고 기쁘다.
(글쓰기가 일이든 놀이든) 이것이 제대로 의미를 가지려면 내가 쓰는 글이 쓸모가 있어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으로 행복을 사지는 못한다. 그러나 돈이 아주 없으면 행복해지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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